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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도상 (功臣圖像)
17세기 초
99.5㎝x191㎝
견본채색(絹本彩色)


충남 당진군 충장사에 소장된 이 초상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17세기 초 제작된 것으로, 현존 상태가 양호한 남이흥(號 城隱)의 공신도상(功臣圖像)이다. 그의 부친은 나주목사로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순국한 남유(南瑜)이다. 아버지가 전사하자 이에 남이흥은 학문을 접고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술을 연마하여 1602년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의 길을 걸었다. 인조 2(1624)년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振武功臣) 32인 중 장만(張滿), 정충신(鄭忠信, 1576-1636)과 함께 일등공신 3인에 속했다. 무관으로 선전관, 부총관, 포도대장, 충청 및 경상 병마절도사 역임, 평안병마절도사, 양서순변사겸 부원수로 게시던 중 정묘호란이 일어나 3만6천 오랑캐(여진족)청군이 침약 해 옴에 비정예군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안주성에서 독전분투 하였으나 충과부적인 상태여서 적을 최대한 성 안으로 유인 화약고에 점화 많은 적과 함께 장열이 전사 하였다. 사후(死後) 영의정에 추증, 의춘부원군 정일품에 증직 되었다.

조선 건국 이래로 태조 원년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을 시작으로 정종 즉위년 정사(定社), 태종 원년의 좌명(佐命) 그리고 영조 4년의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이르는 28회의 공신을 봉했으니 이 때마다 감계적(鑑戒的) 의미로 제작한 초상이 다름 아닌 공신도상이다. 선조와 인조 때는 5회에 걸쳐 공신이 이루어 졌다.
선조 37(1604)년에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한 공으로 호성공신(호聖功臣)과 이몽학(李夢鶴)의 난평정의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등 3회, 광해군 5(1613)년에는 그 해만 무려 5회의 공신책록이 있었다.

남이흥 영정은 이미 조선미 교수의 『한국의 초상화』 (열화당, 1983)에 소개되어 흑백도판으로 게재되었다(pp. 228~229, p79). 좌안7분면(左顔七分面)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으로 사모가 낮으며, 안면의 설채는 피부색에 가까우나 채도(彩度)가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으니 이는 주인공의 피부색을 따름인지 명확하지 않다. 의습은 검은 윤곽에 진채(眞彩)를, 다만 정충신 초상과 비교할 때 관복의 감색이 짙어 천의 무늬가 가려져 보이는데 이는 보수시에 덧칠한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바닥에는 일정 범위에 화려한 무늬가 있는 채전(彩氈)이 깔려 있다. 흉배는 종2품의 해태문양이나 일품을 지시하는 서대(犀帶)를 하고 있어 해석의 어려움을 조선미 교수가 밝힌바 있다. 도판에 의할 때 인물을 따라 일정 거리로 윤곽선이 보이며 이는 원색 도판으로 실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 p436)에 의할 때 교의에 호피(虎皮)가 깔려 있어 구분되지만 양식상 비교적 고식(古式)을 지닌 것으로 사료되어 상세한 검토를 요한다.

남이흥 초상은 정충신 초상과 더불어 진무공신상의 대표적인 공신상으로 화풍이나 양식상 시대적 특정이 선명한 것들이다. 정충신 초상이 보다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었으나 이들 진무공신 초상들을『기사계첩』의 예처럼 일괄로 해서 다시 번호를 주어 보물(寶物)로 지정함이 옳을 것으로 사료된다. 진무공신만이 아닌 다른 공신상의 경우에도 해당된다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