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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서함은 감나무 먹선이 가늘고 긴 문양으로 바탕 판재위에 장방형의 사각틀을 짜 올린 후 미닫이식 뚜껑을 조성하였다.
일반적인 함이 여닫이식임에 비하여 위쪽에 갯탕질(홈)을 파고 못을 사용하지 않은 접착면을 접착제인 어교(漁膠)를 사용한 연귀 맞춤질(정확한 45, 각을 맞춤)으로 처리하였다. 습도나 열에 약한 단점이 있으나 장식이 없이 간결하게 보이며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질감이 뛰어난 숙련된 장인의 작품이다. 미닫이식 뚜껑이 잇는 공예품으로 퇴침, 필통, 찬합 등이 있으며 필갑식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군더더기가 없이 균형 잡힌 수준 높은 전통공예품으로 일괄 지정하여 보수 · 보존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등채(藤策) · 등편(藤鞭)으로 부르기도 하는 지휘봉은 군이나 관료들의 지휘봉 또는 채찍으로 사용되었던 장신구의 일종이며 때론 호신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엄지손가락 크기의 적당한 길이의 대나무 손잡이 부분과 끝부분에 골무형의 주석장식을 박아 마감하고 20cm 크기의 붉은 헝곂을 달아 장식하였으며 그 반대쪽에는 녹피(鹿皮)로 꼰 끈을 촘촘히 동여매 터짐을 방지하였다. 지휘봉의 몸통에는 염색기법의 하나인 점반 죽법의 섬세하고 유연한 필력의 목리(木裏) 문양이 시문되어 있다. 작고 단순한 지휘봉으로 보이지만 세밀하게 검토하여 보면 염색기법을 사용한 아름다운 문양 위용상징으로 매단 붉은 헝겊, 세밀하게 꼬아 만든 녹피 끈 등은 전통공예 분야 가운데서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낙죽기법이 아닌 염색기법의 자료는 흔치 않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2층 죽장의 문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지휘봉도 일괄유물로 지정하여 관리되어야 한다고 사료된다.
 
  화살을 담았던 대나무통으로 크기에 비해 촘촘한 대나무를 사용하여 깨지거나 터지는 것을 막았다.
마디와 마디 사이를 구분지어 대나무와 모란문양을 빈틈없이 빽빽하게 낙(烙)을 놓았다. 특히 마디부분은 연속된 파도문과 같은 굵은 띠를 새겨 마치 책판의 변(邊)문양을 연산케 한다.
근대에까지 전수되어 오고 있는 낙죽화의 문양이나 기능에 비하여 매우 세련되었고 필력이나 기법이 유연하면서 정밀하여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화살통의 부수적인 멜방끈이나 수식이 손실되었으나 남아 있는 화살과 함께 역사적인 유물로 판정되어 지정, 보호되어야 한다고 사료된다.
 
  남녀는 위를 덮지 않은 뚜껑이 없는 의자와 비슷한 작은 승교(乘橋)로 산길 등 좁은 길을 다닐 때 사용하던 가마의 일종이다.
장방형의 4각 틀위에 네 개의 기둥을 세워 사개물림하여 튼튼하게 세워 동자 사이에 2단의 머름판을 두르고 난간을 돌렸다. 사각형 바탕에 전후 구멍을 내고 긴 장대를 꽂아 2~4명이 어깨끈을 이용하여 사람을 태우고 안전하고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하였다. 평상에 사용되었던 것과 같이 삼면 난간에는 둥근 막대를 사용하였는데 등받이쪽과 좌우측에 유연한 곡선을 살짝 흘려 아름답고 매우 편안한 느낌을 준다. 남녀의 전면에는 황토를 섞은 붉은 주칠을 하였다.
특히 난간 중간에 유운문과 봉두형의 구름조각 받침이 매우 인상적이다. 목재의 연결부의는 자형의 거멀장식으로 견고하게 짜여졌으며 단조로우면서도 안정감이 있어 조선시대 후기 목공예품의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상류층 생활문화의 한단면과 전통공예미를 잘 나타내고 있어 일반 유물과 함께 일괄지정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시체를 묻은 뒤 신주(神主)와 혼백(魂帛)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작은 가마를 말하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영여(靈輿)라 부르기도 한다. 사각의 견고한 바탕틀 위에 가로 세로 동자를 세워 2단의 머름판을 두르고 4면에는 여닫이 투각 연속삼각형 문양 창문을 낸 후 상단부에 다시 머름판을 돌려 지붕으로 연결시켰다.
옥개형 처마를 두른 안쪽에 궁륭천장을 설치하여사람이 타고다니는 가마의 축소판을 만들었다.앞 쪽에 활주 같은 기둥을 세워 만들어진 공간이 구성되는데 신주나 혼백, 위패 등을 노출시켜 운방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바탕에 고정된 운문형의 목가구 족통사이로 긴 장대를 좌우에 부착하여 두사람이 가볍게 손으로 들고 운반할 수 있도록 긴 장대 손잡이가 만들어져 있다. 마름판에는 여의두문이 음각되었고 동자와 각 기둥의 연결부위에는 T자형 거멀장으로 견고하게 짜여져 있다. 요여의 전면에는 황토를 섞은 주칠을 하였고 처마 부분에 꽃모양도 보인다.
천정부분과 창문 일부분이 약간 파손되었으나 원자재는 고스란히 남아 있어 보수가 가능하다.문중 집안의 장례때만 사용되었으며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보관되었기 때문에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으로 위장례 및 목가구 연구에 필요한 민속 공예 자룔로 일괄 지정 · 보호되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일반적인 장례에서는 홀관을 사용하엿으나 사대부 등 지체 높은 부자집이나 효심이 지극한 자손들은 망자의 시신을 빨리 섞지 않고 관으로 침입하는 나무뿌리나 해충을 방지하기 위하여 겹관을 사용하였다.
관외 재료는 부분 파손 방지나 빨리 섞는 목심(木芯)이 보이는 나무는 피하고 공이가 없고 목리가 촘촘한 고급 재료를 사용하였다.
외관 내관 모두 관의 6면 두께가 일정하며 사개 짜임으로 못하용 흔적이 보이지 않지만 매우 견고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또 바닥 판재와 좌우벽 덛널판지, 천판의 이음 부분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은장(나비 날개형 쐐기)을 박았던 흔적이 보인다.
충장공의 유품에는 부부의 관이 완벽하게 출토되었고 완벽성을 기하여 제작된 관이였기에 출토당시 관의 내부 유품 또한 보존상태가 양호하였다. 16세기 전부한경의 출토 목관은 토지박물관, 단국대학교 박물관 등에서 보관 중인 유물과 같다.
역사적인 인물의 관으로써 제작시기 판단이 가능하며 상태 또한 완벽하여 일괄 유물로 지정 보호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백자대접, 백자주병은 조선후기 17~18세기 제작으로 판단된다. 묵서명문이 남아 있는 대접은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출토 유품과는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되며 출토지가 확실하지 않고 주병 또한 품위 있는 유형으로 보인다.
그러나 출토지가 불분명하므로 지정 대상에서는 제외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백자대접, 백자주병은 조선후기 17~18세기 제작으로 판단된다. 묵서명문이 남아 있는 대접은 충장공 남이흥 장군의 출토 유품과는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되며 출토지가 확실하지 않고 주병 또한 품위 있는 유형으로 보인다.
그러나 출토지가 불분명하므로 지정 대상에서는 제외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원래는 8폭 병풍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자수 액자의 바탕 비단은 일제시 제작된 비단이며 수 명문 내용이나 사당 역시 일제시대 유행하였던 기법으로 지정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일명 청사초롱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혼례식 때 사용하였으며 파손상태가 불량하여 복원 또한 불가능 하므로 지정대상에서 제외한다.